안녕 난 지난 주 대단한 악담 사주를 듣고 온 레이지 카우🤣 우리는 어디까지 예언을 믿을 수 있을까? 운명은 개척하는 것이라는 믿음은 평소 없는 듯 살다가 믿고 싶지 않은 현실이나 예언에 대한 좋은 핑계로서 떠올리곤 해. 재미있는 점은 내 운명에 낀 수많은 살들 때문에 난 운명대로 살면 안되고 운명을 개척해야 한다는 게 사주의 주요 메시지였달까. 아이러니하게도 개척을 위해 따라야하는 예언의 운명에서 난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을까? 절대 죽을 생각하지 말라던 말씀을 떠올리며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 오늘 소개할 책의 메시지를 곱씹어봤어. 미래도, 여전히 사는 이유도 알 수 없지만 더이상 이유는 중요하지 않다고. 인생엔 선택만이 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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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프 신화
눕방일기를 오래 구독해온 사람이라면 고통의 의미를 찾고싶은 나의 끈질긴 관심을 짐작할거야. 알베르 카뮈의 [시지프 신화]에 이르게 된 건 내 질문의 과정에서 당연하고 조금 늦은 일 같기도 해. 실존주의 문학을 대표하는 카뮈의 소설 [이방인], 희극 [칼라굴라]와 함께 ‘부조리 3부작’으로 언급되는 철학 에세이야. 이 책을 읽은 덕분에 카뮈에 대한 오해 두 가지를 풀었어. 첫 번째는 [시지프 신화]가 소설인줄 알았다는 점이고, 두 번째는 11년 전 [이방인]의 결말을 완전히 반대로 이해했었다는 점이야. [시지프 신화]는 [이방인]과 같은 해 출판했지만 먼저 쓰였고 사실상 그의 작품세계를 정립한 개론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야. 책을 펼치면 곧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자살이다. 인생이 살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하는 것이야말로 철학의 근본 문제에 답하는 것이다.’ 라는 카뮈의 명료한 논제가 등장해. 결론부터 말하면 자살은 부조리의 해결이 될 수 없음이 카뮈가 내린 답이야. 어째서 우리는 고통이 가득한 이 삶을 살아야 한다고 카뮈는 말하는 걸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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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프가 나의 관심을 끄는 것은
바로 저 산꼭대기에서 되돌아 내려올 때,
그 잠시의 휴지의 순간이다.
(중략)
마치 호흡과도 같은 이 시간,
또한 불행처럼 어김없이 되찾아 오는 이 시간은
바로 의식의 시간이다.
그가 산꼭대기를 떠나 제신의 소굴을 향해
조금씩 더 깊숙이 내려가는 그 순간순간 시지프는
자신의 운명보다 우월하다.
그는 그의 바위보다 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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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존주의적 의미로서의 '부조리'
부조리, ‘이치에 맞지 아니하거나 도리에 어긋남. 또는 그런 일’이라는 사전적 의미와 카뮈가 말하는 실존주의적 의미는 조금 달라. 삶은 인간에게 살아야 할 이유를 설명해주지 않고 이해할 수 없는 불행을 산발적으로 일으켜. 그럴 때마다 납득하고자 하는 인간이 삶의 의미는 없다는 걸 깨달았을 때, 그럼에도 살아야하는 삶이 남아있을 때 그 간극을 카뮈는 부조리라는 단어로 정의했어. 부조리 철학의 핵심이 된 시시포스 신화에 대한 재해석은 사실상 [시지프 신화]에서 6페이지 정도에 불과해. 기구한 운명을 지난 노년의 오이디푸스가 한 말 “내가 판단하건대 모든 것이 좋다”를 인용하여 바위를 산 정상까지 반복해서 올려야하는 벌을 받은 시지프의 행복함에 대한 재고를 외친 젊은 작가의 목소리는 아직까지 중요한 철학적 견해로 남아있어. 시지프가 떨어진 바위를 향해 내려오는 바로 그 ‘휴지의 순간’을 주목하는 카뮈는 시지프가 비극적인 이유는 의식이 깨어있어서이고 ‘불행처럼 어김없이 되찾아 오는 이 시간’의 시지프는 ‘자신의 운명보다 우월하다. 그는 그의 바위보다 강하다.’고 믿었어. 어떤 구원도 바라지 않으면서 현재를 남김없이 소진하려는 시지프의 태도는 ‘반항, 자유, 열정’이라는 부조리에 대한 카뮈의 세 가지 귀결을 이끌어내는 존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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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의미를 대체하는 반항하는 인간
자살이 부조리의 답이 되려면 일단 감정적 선택이 아닌 논리적 귀결로 인한 선택이어야하는데 후자가 가능하다고 할지라도 자살함으로써 부조리라는 명제 자체가 사라지는 것이고, 종교 역시 현세가 아닌 내세로 모든 문제의 답을 미루기 때문에 카뮈는 모두 회피의 일환으로 봤어. 대신 무대마다 다른 삶을 살고 죽기를 반복하는 연극 배우, 매번 다른 수많은 상대와 충실한 사랑을 하겠다 결심한 돈 후안을 비롯, 신에게 바라기보다 원하는 대로 삶을 바꾸겠다는 정복자, 문제를 해결하는 대신 세상을 묘사하려는 무심한 창조자를 시지프처럼 부조리에 반항하는 이상적인 모습으로 해석해. ‘자살은 답이 될 수 있는가’ 다시 말해 ‘삶은 살 가치가 있는가’는 세계대전으로 황폐하고 무력해진 시대에 대한 질문이었고, 바꿀 수 없는 운명에 지지 않으며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고 스스로 삶을 원하는 방향으로 끌어가고자 하는 카뮈의 귀결은 말 그대로 삶이 아니라 인간 실존의 의미를 역설하고 있어. 희망 같은 것이 아니야. [시지프 신화] 부록에 나오는 카프카 작품 속 부조리 세계에 대한 비평에서 카뮈는 모호한 희망조차 부조리의 창조가 아니라고 여기기 때문에(있는 그대로 현실을 묘사하는 창조자가 아니기 때문에) 삶의 가치와 무관하게 오로지 무엇도 기대하지 않고 반항하는 삶 자체를 지속하는 자가 가치있다고 여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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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기하지 않는 무력한 개인의 생명력
최근 비문학 베스트셀러가 쇼펜하우어와 니체로 바뀌는 현상은 삶의 부조리를 느끼는 현대인들에게는 더이상 죽은 뒤에 찾아올 불멸의 세계가 지금을 견뎌야 할 충분한 대가가 될 수 없고, 삶은 고통이라는 직설적이고 시니컬한 주장이 차라리 현재를 긍정하는 현실 조언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연장선에 카뮈의 부조리론이 있어. ‘오늘 날의 노동자는 그 생애의 그날그날을 똑같은 작업을 하며 사는데 그 운명도 시지프에 못지 않게 부조리하다. 그러나 운명은 오직 깨어 있는 드문 순간들에만 비극적이다. 신들중에서도 프롤레타리아요, 무력하고 반항적인 시지프는 그의 비참한 조건의 넓이를 안다.’라고 말하는 카뮈에 따르면 우리의 운명도 시지프와 다름 없지만 그러므로 매일 반복하는 노동은 우리가 “깨어있는” 이상 멈추지 않는 주체적 반항일 수 있어. 결론에 이르고나니 [이방인]에 대한 오해가 민망해졌어. [시지프 신화] 초반 카뮈는 ‘설사 시원찮은 이유를 대고서도 설명할 수 있다면 그 세계는 낯익은 세계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돌연 환상과 빛을 박탈당한 세계에서 인간은 자신을 이방인으로 느낀다.’라고 부조리를 발견한 자가 자신의 삶으로부터 소외되는 순간을 묘사하는데 소설 [이방인]에서 뫼르소의 운명을 대체할 수 있는, 혹은 예언하는 문장이기도 하지. 자신의 죽음에서 자신이 소외되는 기이한 운명을 향해 가는 뫼르소는 마치 모든 죽음에 무관심한 사람처럼 보여서 나 역시 소설 속 사람들처럼 그를 오해했고, 나는 이 태도가 카뮈의 허무주의라고 생각했어. 다만 그는 카뮈가 말하는 ‘회피’의 방식으로 부조리를 해결하지 않고 직면함으로서 삶에 마지막 반항을 하는 ‘부조리의 인간’이었음을 이제 알겠어. 흑사병으로 폐쇄된 도시 안에서 무력한 대재앙에 지지않고 어떻게든 자신이 할 수 있는 몫을 매일 해가며 살아가고, 연대하는 사람들에 대한 소설 [페스트]는 그런 점에서 [시지프 신화] 철학이 문학적으로 명확하게 드러난 작품이야. [시지프 신화]는 읽기 쉬운 작품은 아니었어. 문장 하나하나 해석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거든. 그럼에도 삶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열망, 그 강렬한 생명력만은 온전히 전해져서 이제는 더이상 고통의 의미를 묻거나, 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을 갖지는 않을 것 같아. 대신 내가 무너질 것 같을 때마다 떠올릴 이미지는 산꼭대기에서 다시 내려가는 시지프의 발걸음이야. 죽음으로 피하지 않고 주어진 삶을 끝까지 직면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삶에 대한 최고의 반항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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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람포인트
10여 년 전에 한참 난 카뮈를, 특히 카뮈와 스승 장 그르니에의 편지를 모은 [카뮈-그르니에 서한집 1932~1960]를 좋아했어. 몇몇 문장들을 소개할게. 우리는 성공한 작가로서의 알베르 카뮈만을 생각하지만 대작들이 나오기 이전의 불안함, 자신에 대한 의심들을 스승에게 털어놓는 글들이 기억에 남아있어. 예전 리뷰를 찾아보니 ‘다듬어지지 않은 재능을 가지고 어찌할 바 모르던 젊은 청년이 점차 깊어지며 자연스레 스승이 예전만큼 필요치 않아지는 것도 보였고, 자신의 세계를 구축해가는 과정도 재미있었다. 그런 그를 꾸준히 지켜보는 그르니에의 시선도.’라고 썼더라고. 참고로 카뮈는 안타깝게도 교통사고로 이르게 세상을 떠났어. 이 책의 마지막은 카뮈가 서문을 쓴 장 그르니에의 [섬]이 발간되자 그르니에가 카뮈에게 발송한 편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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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알베르 카뮈가 장 그르니에에게 [1938년 6월 18일] 선생님께서는 솔직히 제가 계속해서 글을 쓰는 게 옳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아주 불안한 심정으로 그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집니다.
80. 장 그르니에가 알베르 카뮈에게 [43년 부활절] 우리는 항상 어둠 속에서 더듬거리며 서로에게 다가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한 번도 나와는 무관한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당신의 생각도, 당신의 고독도. 유감스럽게도 많은 다른 사람들이 그렇듯 나는 이기적이었고 몰이해했습니다. 인간들이 서로 갈라지는 것은 그들이 그들 자신의 한계에 또다른 한계들을 덧보태기 때문이고, 자기 속에 웅크린 채 편협해져서 남이 뚫고 들어올 자리를 남겨놓지 않기 때문입니다. 허영에 찬 자기만족으로 보여서도 안 되겠지만, 우리는 자연스레 자신을 내맡겨놓을 줄 알아야 하는데 말입니다.
155. 알베르 카뮈가 장 그르니에에게 [1950년 1월 1일]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악수가 우정을 나타내는 최상의 표현이라면, 저는 가장 다정한 마음과 함께 바로 그 악수를 선생님께 보내고 싶습니다.
232. 알베르 카뮈가 장 그르니에에게 [1959년 5월 26일] 저는 상상력이 풍부하지 못해서 다른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은 별로 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더 나은 사람이 되지 못해 유감스럽다고 여기는 때는 더러 있습니다. 젊을 때는 자신이 발전할 수 있다고 믿고, 또 굳은 결심으로 많은 시간을 바치면 결국은 자신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고 믿지요. 그러다가 마흔다섯 살에 이르고 보면 맨 처음 시작할 때의 그 상태, 또는 그 비슷한 상태에 머물러 있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발전에 대한 믿음만 없어진 채로 말입니다. 요컨대, 자기 자신과 더불어 살아나가는 수밖에 없는 거지요. 알량한 진리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235. 장 그르니에가 알베르 카뮈에게 [60년 1월 1일] <섬>은 루르마랭으로 우송합니다. 주석. 알베르 카뮈의 서문이 붙은 장 그르니에의 <섬>(갈리마르, 1959). 루르마랭으로 보낸 이 책은 알베르 카뮈가 사망한 뒤에 배달되었다. 이 책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쓰여 있다. "이제 이 책은 내것이라기보다는 당신의 것이라고 해야겠어요. 건강하시오. 1960년 1월 1일, 장 그르니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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