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호프 [바냐 삼촌]의 마지막 독백을 매일같이 되뇌이는 요즘이야. <드라이브 마이 카>의 마지막 장면이기도 한데, 열심히 참고 견뎌 일하고, 죽으면 쉴 수 있다는 그런 내용이야.. 죽어서 쉬면 되지. 안그래?😇 다들 지칠 때 어떻게 이겨내? 나는 그냥 그래도 꾸역꾸역이라도 해야할 일을 하자는 편이야. 그러다보면 언젠가 나도 모르게 괜찮아져 있을거라고 믿고는 있는데 역시 생각할 때와 실제 할 때는 많이 달라. 만의 비법이 있다면 레이지 카우 살린다 생각하고 알려줄래? 그리고 2주년 티셔츠를 기다리고 있는 구독자들, 1주일만 더 기다려줘! 샘플 과정에 휴일이 껴서 생각보다 길어졌고, 드디어 지난 주말쯤 포장은 했는데 배송처에서 수거에 시간이 조금 걸린다고 해. 배송이 너무 늦어져 미안!

몇 달 전 지인 추천으로 스레드에 가입했어. 팔로우 하지 않은 불특정 다수의 포스팅을 알고리즘에 맞춰 추천하는 시스템이라 유튜브 텍스트 버전같은데, 내 피드에 특정 만화가 자주 언급되는거야. 마영신 작가의 [아티스트]였어. 문화예술 종사자들은 얼굴이 화끈거려 보기 힘든 하이퍼 리얼리즘이라는 간증글을 보며, 그들 세상에 반쯤 걸쳐 살아온 직장인이었으니 우린 얼마나 같은 모습을 목격했을까 궁금해졌어.

화가 겸 시간강사인 곽경수(48세, 이혼), 소설가 신득녕(45세, 미혼), 뮤지션 천종섭(44세, 미혼), 남자 예술가 모임 ‘오락실’ 멤버인 세 사람은 성공한 멤버들이 차차 발길을 끊어 이름만 남은 모임의 명맥을 이어가는, 잘 되지 못한 예술가들이야. 빛도 거의 없는 어두운 방 안에서 잘 나가는 옛 지인들을 질투하는 세 사람이 “우리 셋은 누가 잘되면 무시하지 말고 서로 진심으로 위하며 살자”고 다짐하며 찍은 셀카를 ‘오락실 의리파 멤버 형들과 회쏘중!’이라며 인스타그램에 포스팅하는 일이 불과 24페이지만에 벌어져. 나는 만화책으로 봤는데 알고보니 카카오 웹툰 연재작이더라고. 3시간에 한 편 무료 공개되는 3다무로 볼 수 있고, 11화까지는 무료야. 11화까지 봤다면 아마 그 다음은 멈출 수 없을걸.

📺볼 수 있는 곳 : 카카오 웹툰

#만화로 그린 다큐멘터리

영화는 편집의 예술이라고도 하는데 [아티스트]를 읽다보면 편집을 탁월하게 잘한 다큐멘터리를 보는 기분이 들어. 마영신 작가 작품들에 ‘사실주의’라는 수식어가 빠지지 않는 이유겠지. ‘예술하는 사람들 중에 능력은 없는데 자의식만 강한 꼰대 많아’라고 막연하게 구전으로 퉁쳐왔던 고질적인 문화예술업계의 역사에 대해 실제 경험에서 추려낸 몇 가지의 구체적 사례로 완벽 복원해낸 작품이기 때문이야. 감탄이 나오는 부분은 펼쳐진 수 많은 사건들 중에서 적절한 증거들을 모아 이야기로 엮어내는 연출력이야. 웹툰 2화에 닉네임 ‘애미’라는 분이 ‘끈끈한 공감대를 느끼면서 마주보면 무력감과 혐오감이 느껴지는 관계, 오랫동안 답보상태로 후퇴도 전진도 못하는 예술가들의 초상화네요’라고 남긴 댓글이 만화 전체를 관통하는 완벽한 평이라 이보다 더 잘 설명할 자신이 없더라. 

곽경수, 신득녕, 천종섭은 오늘과 내일이 다르지 않았을 것이 뻔해. 이들 세계에서 여자는 아주 쉽게 성공 기준이 되고, 줄곧 술만 마시면서 작업에 시간을 쏟지도 않고, 성공한 예술인들의 진정성을 의심하거나 예술적 완성도를 폄하하며 자신의 실패를 마치 숭고한 신념 때문인 것 마냥 세상을 탓하거든. 누구보다 물질적 성공을 원하는 이들이 역으로 성공한 이들과 자신을 구분지으며 본인의 욕망을 속이고 있는 모습이 신랄하게 묘사돼. 힙합을 듣다보면 ‘내가 돈을 따라가는 게 아니라 돈이 날 따라온다’는 가사를 종종 만나는데, 사십대 중후반의 '오락실' 남은 세 멤버는 랩퍼의 허슬에 아직도 로망이 있는 모양이야.

#너의 자만, 나의 자격지심

곽경수는 셋 중 가장 거들먹거리길 좋아하면서 게으른데다 어른답지 않게 순간마다 미성숙한 감정을 배설하는 유치한 부분이 있어. 돈 되는 일을 좋아하고, 노골적으로 출세에 도움되는 이들에게 줄을 서는 사람이라 오히려 가장 덜 모순적인 사람이야. 한편 신득녕과 천종섭의 관계가 묘한데, 히트곡 없는 싱어송라이터 천종섭의 글 재주를 미리 발견해서 에세이 작가로 성공시킨 조력자가 신득녕이야. 정작 본인의 소설은 출판하지 못하고 있으면서 에세이를 써보라고 권하고, 글의 방향을 기획해주고, 제목까지 지어준데다 심지어 출판사에 연결까지 해준 덕에 천종섭은 스타 작가가 되었어. 식당에서 카드 결제 사인을 할 때 농담인지 진담인지 “나 아무데나 싸인 안 하는데.”라고 중얼거리는. 그런데 ‘기획은 누가 해주었나’라는 질문에 ‘어쩌다보니 나왔다’고 답한 천종섭의 인터뷰를 본 신득녕의 마음은 무너지고 말아.

“건방 떨지마!! 책 하나 내고 연재하고 작가님 작가님 소리 들으니까 진짜 작가 선생 된 거 같지? 네가 문학을 알아? 네가 락을 다 알아? SNS에 사회적인 글 공유하고 깨어 있는 진보 시민인 양 글 쓰면 네가 진짜 그런 인간이 된 거 같지? 공짜로 얻은 도덕적 우월감을 맛보니까 그게 진짜 같지?” 천종섭을 향해 터져나오는 신득녕의 분노는 후배의 성공에 배아픈 선배의 치졸한 시기일 수도 있으나, 비슷한 제목과 비슷한 주제, 비슷한 문장으로 에세이 작가가 되어 활동하는 사람들을 꼬집는 말처럼도 보여서 통쾌하기도 해. 

#들여봐야 하는 인간의 불편함에 대하여

궁상맞은 시절로 시작한 세 인물에게 종국엔 각자 바라던 형태로 일종의 성공이 주어졌을 때, 그러니까 자격지심과 자의식 과잉이라는 모순으로 똘똘뭉친 영향력 없던 사람에게 물질적, 사회적 권력이 생겼을 때 그들은 소위 말하는 ‘초심’을 얼마나 유지할 수 있을까. 그들이 비난하던 성공한 예술인과 얼마나 다를까. 초반 블랙코미디처럼 깔깔 웃다가 풍요는 얻었으나 여전히 가난한 정신이 새어나오는 이들의 후반부는 소름이 돋을 정도로 무시무시하기도 했어. 상대적으로 투명한 곽경수와 천종섭에 반해 1/N로 수익을 나누는 실험적이고 평등한 잡지를 창간하여 늦게 궤도에 오른 신득녕은 돈과 여자문제, 권력으로부터 떨어져 다른 길을 가는 듯도 한데, 자신이 가장 무력했을 시기 비참함을 안겨줬던 천종섭을 치켜세우는 척 하며 궁지로 몰아세우는 모습은 여전히 옹졸한 예전의 그릇 그대로 같기도 하거든. 

누구에게나 감추고 싶은 내가 있어. 현장 르포라고 부르고 싶을 정도로 적나라한 일화들을 걷어내면 추잡하지만 나약한 인간의 모순만이 남아. 마치 세 인물이 실패를 숨기고 싶어서 이상향을 비난하듯, 대상화된 인물들을 비웃다가 나중엔 웃질 못하겠더라. 나는 곽경수와, 신득녕과, 천종섭과 얼마나 다른데?

지난 주말 국립현대무용단의 ‘내가 물에서 본 것’이라는 공연을 볼 때 시종일관 불편함을 유도하는 장치들 때문에 감정이입이 쉽지 않았거든. 관객과의 대화에서 안무가는 “세상에 아름다운 것만 있지는 않잖아요”라고 말했어. 그리고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한강 작가의 소설에 대해 읽기 힘들다, 불편하다는 반응도 꽤 많더라고. 그런데 우리가 제일 이해해야하고, 이해하기 위해 더 오랜 시간 들여다보아야 하는 건 불편함에서 파생된 감정이란 생각이 들어. [아티스트]는 그럼에도 아주 재미있는 만화야. 마영신 작가는 만화에서 ‘재미’가 제일 중요하다고 말하는 사람이니까.

#관람포인트01

[아티스트] 외전 [아티스트 : 곽경수의 길]도 웹툰으로 연재되었고 단행본으로도 출간되었어. 곽경수의 과거사가 담겼대.

나는 평소 주변 사람들에 대해 많이 생각하거든. 개개인마다 고유한 행동 패턴의 원인을 알고 싶어. 어떤 과거가 지금의 이런 행동을 결정하게 만드는지 몹시 궁금해서 이해해보려고 하는거야. 그런데 좋아하는 사람보다 싫어하는 사람을 더 생각하게 되는 거 알아? 무지가 공포의 시작이니, 이해한다면 괜찮아지지 않을까 싶어서. 그런 점에서 곽경수의 외전이라니, 인간의 마음에 실체가 있다면, 마영신 작가는 그 안에 들어선 초소형 카메라같아.

외전에 이어 곽경수의 개인전 컨셉으로 전시회도 열렸었어. 웹툰 맨 마지막화에 ‘곽경수 프로젝트 안내’라는 무료 회차를 참고해. 마지막에 소설가 박민규가 곽경수 의뢰를 받아 전시 소개를 쓰는 내용인데 읽다보니 이정도면 곽경수는 실존인물이 아닌가 싶을 정도의 생동감에 깜짝 놀랐어. ‘다만 경수는 비로소 자기 자신을 용서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는 문장 하나로 혐오스러운 곽경수의 일생이 갑자기 깨끗하게 축성받은 듯 느껴질 정도.

#관람포인트03

비트코인 실패로 돈을 벌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일을 시작했다는 인터뷰를 봤는데(ㅋㅋ) 마영신 작가는 본인 단독 작품 뿐만 아니라 신진 작가들의 웹툰 기획을 돕기도 해. 내가 최근에 본 것만 이현중 작가의 [환상의 애니], 강여름 작가의 [RAINBOW], 언경 작가 원안의 [호도] 등이 있어.

📮구독자 답장왔어요📮

From.익명

[RE: 눕방일기 96화]나도 [선재 업고 튀어], [눈물의 여왕], [오징어 게임] 등등 다 안보고 [스테이지 파이터] 보고 있는 사람이라 공통점이 많아서 너무 반가운 글이었어! 쉴 때마다 참가자들 공연 영상 보는 찐애청자로 하고싶은 말이 많았는데 좋은 점 아쉬운 점을 친구랑 얘기하는 기분이라 순식간에 읽어내려가지더라. 앞으로가 기대되는 [스테파] 화이팅 레카소 화이팅~!!!

📝레이지 카우의 답장

꺅 난 요새 [스테이지 파이터] 보는 사람 만날 때 제일 반가워🤗 나 같은 취향이 또 있었네!!! [스테파]가 시작하고 개인적인 애환 중 하나는 뉴스레터 마감일과 방영시간이 겹친다는거야...꾹 참고 마감하고 나면, 금요일 밤까지 볼 시간이 없어서 애가 타... 이번 주 선공개 보니 또 악마의 편집 있는 것 같던데 분노를 잘 이기며 보자구😂 레카소 응원도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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