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말로 시작할까 썼다 지웠다 하다보면 꼭 잘 보이고 싶은 사람 앞에선 “오늘 날씨가 좋죠?”같은 아무 의미도, 재미도 없는 말만 하던 순간이 떠올라😂 20대 때는 간절함이 상대를 설득할 수 있는 무기라고 생각했는데 치우친 감정의 크기는 자신을 을로 만든다는 걸 깨닫는 요즘이야. 처음 취업할 때만 해도 얼마나 이 회사에서 진심으로 일하고 싶은지 피력했던 말들이 유효했다면, 이제는 반대의 입장이 되어보니 이곳이 아니면 안된다는 구직자보단 적당히 현실적인 온도의 구직자가 맘이 편하더라. 나에게 관심 없는 사람이 더 궁금해지기도 하잖아. 상대에게 마음을 100% 보여주지 않음으로서 자존심을 지킬 수 있는 경우가 많다고 느껴. 하지만 세련되지는 않아도, 계산하지 않고 기꺼이 줄 준비가 되어있는 마음들은 죄가 없지 않아? 난 감정이 아주 아주 많고 표현도 잘 하는 편이라 소위 밀당 잘 못하고, 사랑을 마구 쏟는 편이야. 스스로를 싫어하지 않을 수 있게 이런 마음을 우습게 여기지 않고 고맙게 받을 수 있는 곳이 언젠가 꼭 있었으면 좋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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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쇠약 직전의 여자
지난 주말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 신작 <룸 넥스트 도어>를 봤어. 워낙 화려한 붉은 색으로 유명한 감독이잖아. 그런데 이번엔 빨강, 자주, 파랑, 연두, 주황같은 원색들이 영화에 등장하는 에드워드 호퍼 그림처럼 발산하지 않고 수렴하는 것처럼 보였어. 줄리안 무어, 틸다 스윈튼이 죽음 앞에서 존엄과 품위를 지켜내는 방식으로. 이토록 우아하게 논란의 주제를 던지는 감독은 없을거야. 간만에 극장에 갔고, 영화는 흡족해서 마음의 짐이던 감독의 초기작을 볼 수 있을 만큼 의욕이 차올랐어. 알모도바르 대표작 3대장인 <내 어머니의 모든 것>, <나쁜 교육>, <귀향>을 아직 안봤다고 하면 표정은 어떨까😅 이번에도 세 작품이 아니라 1988년까지 거슬러 올라갔어. <신경쇠약 직전의 여자> 제목을 보자마자 난가..? 하고 담아둔 지 몇 년 째, 드디어 관람하고 알게된 새로운 사실. 내가 아는 페드로 알모도바르는 화려한 색마다 농축된 슬픔이 배어있는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었는데 죽음 앞의 품위를 논하게 된 노년의 감독에게도 이렇게 천방지축 폭주하는 시기가 있었음에 깜짝 놀랐지 뭐야. 보수적인 부모님이 대학시절 할리데이비슨 타는 사진을 봐도 이렇게 놀랍진 않을거야.
📺볼 수 있는 곳 : 왓챠, U+모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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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난 사랑을 추적하며 미쳐가는 여자
유명 성우 페파(카르멘 마우라)가 침대에 엎드려 잠들어 있는 침대 위로 동료이자 애인인 유부남 이반(페르난도 길런)이 남긴 전화 자동응답 메세지가 흘러나와. 곧 여행을 떠날 예정이니 두 사람의 펜트하우스에 있는 자신의 짐을 챙겨 내놓아달라고.
“거짓말 해줘. 늘 기다려왔다고.
내가 돌아오지 않았으면 죽었을 거라고 해.
아직도 나처럼 사랑한다고 말해.”
일방적으로 떠나버린 이반이 남긴 건 페파가 대답해야 할 상대 역의 대사와 산발적으로 걸려오는 회신할 수 없는 자동 응답 메세지 뿐. 핸드폰이 없는 시대의 특수성이 더해져 이반이 있을만한 곳을 추적하는 페파가 그야말로 미치기 일보 직전까지 다다르는 동안, 남긴 메모는 곧 다른 사람에 의해 파기 당하고, 전화를 걸면 그는 떠났고, 그가 전화를 하면 페파는 이반을 찾기 위해 역시 떠나있어. 페파는 계속해서 한 사람만을 원하고 쫓는데도 두 사람의 만남은 번번이 좌절되길 반복하며 성냥에서 불이 번진 페파의 침대처럼 무질서와 혼돈이 겉잡을 수 없을만큼 영화 가득 번져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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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에 관한 영화
기이한 건 페파의 펜트하우스로 모여드는 사람들, 또 다른 혼돈들이야. 집을 구하기 위해 우연히 구경 온 이반의 아들 카를로스와 약혼녀, 시아파 테러리스트와 사랑에 빠져 경찰로부터 몸을 숨긴 친구, 그들을 추적하는 경찰, 이반을 찾기 위해 정신병원에서 탈출한 전 아내이자 카를로스의 친모까지. 알모도바르의 강인한 여성 캐릭터 시초에 페파가 있다는 걸 생각해보면 영화의 제목이 신경쇠약의 여자가 아니라 신경쇠약 '직전의' 여자인 이유가 대단한 힌트가 되겠지.
“늘 기다려왔어요.
당신이 돌아오지 않았으면 죽었을 거예요.
당신이 날 사랑하듯 여전히 당신을 사랑해요.”
수면제를 탄 붉은 카르파초를 초대하지 않은 손님들이 마시고 차례대로 정신을 잃는 시점이 영화 시작 수면제에 취해있던 페파에게는 반대로 자신이 무엇을 해야할지 또렷하게 깨달은 순간이야. 불협화음의 카타르시스가 절정에 다다르는 이 장면에서 사랑에 관한 영화가 아니라 이별에 관한 영화였음을 확신했어. 이반이 녹음한 대사에 대답하는 연기를 하다 슬픔에 기절해버린 초반의 페파는 더이상 대면을 회피하는 비겁한 이반의 한 발 늦은 메세지들에 눈물 흘리지 않아. 그토록 보고싶었던 이반을 마주했을 때 그녀는 그들의 사랑은 이미 늦었음을 직감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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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쇠약 직전에 Adios
신경쇠약 거의 직전, 끝내 무너진 세계로부터 자신을 구하는 여성 서사로서 1988년이라는 시대를 생각하면 더 발칙한 <신경쇠약 직전의 여자>는 근래 보기 드문 방식으로 유쾌함과 해방감을 주는 영화이지만 한편으론 영화와 나의 괴리에 대해 생각했어.
질척의 아이콘인 나는 나쁜 사람은 되고 싶지 않고, 문제를 직면하기엔 심란해서 이기적으로 회피했던 이반같은 사람들 때문에 너무 많이 울었어. 울어줄 가치가 없는 사람이라는 것도 매번 너무 늦게 깨달았어. 그리고도 자주 반복했어. 여전히 아무 도움 안되는 사람들 때문에 흔들리고, 페파처럼 “Adios”라고 먼저 끝을 맺지도 못했어. 영화에선 사랑에 미쳐있는 누군가의 애인에서, 오로지 나로 되는 일이 2시간 내외에 가능한데, 닮고 싶을 수록 현실의 내가 미약하게 느껴지는 거야. 사실 당연해. 영화는 현실이 아니니까. 누구나 페파가 될 수 있다면 영화도 될 수 없었겠지.
정말 잘 만든 코미디 끝엔 심연의 슬픔이 묻어나온다고 생각해. <신경쇠약 직전의 여자> 초반, 머리속에 이반 외엔 아무것도 없던 페파는 나 같았고, 그래서 이반을 향한 페파의 마지막 대사는 채도와 감정과 혼돈 과잉의 코미디가 펼쳐지는 난장판 속에서 처음으로 주변 모든 소리가 꺼진 듯, 페파가 쌓아온 영화에 담기지 않은 시간만큼의 감정 여파가 전해져왔어. 현실의 삶이 편집 전의 촬영본이라면, 그렇다면 저 말을 할 수 있을 때까지, 죽어도 신경쇠약까지는 가지말고, 직전에는 기어코 나를 구해보기로 결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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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람포인트01
장 콕토의 [인간의 목소리]라는 희극이 영화 원작이라는데, <신경쇠약 직전의 여자들>이라는 제목으로 영화를 원작으로 한 브로드웨이 뮤지컬도 있어. 한국 제목은 ‘여자’라고만 했지만 영어 제목으로는 이미 ‘women’으로 쓰고 있고, 영화를 봤다면 '여자들'에 충분히 끄덕일만해. 뮤지컬 사운드트랙도 들어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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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람포인트02
페드로 알모바르도 감독과 <정열의 미로>, <마타도르>, <신경쇠약 직전의 여자>, <욕망의 낮과 밤>, <내가 사는 피부>, <페인 앤 글로리> 6편을 함께 한 안토니오 반데라스의 젊은 시절 모습을 볼 수 있어. 사실 난 크레딧 볼 때까지 못 알아봤어. 이반의 아들 카를로스 역이야. 요랬는데, 요래됐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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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람포인트03
안본 전작이 꽤 있어서 페드로 알모도바르 주간을 가져보고 싶어서 찾아봤어. 가장 많은 작품이 왓챠에 있더라고! 구하기 어려웠던 초기작이 많아. <나쁜 버릇>, <내가 뭘 잘못했길래>, <욕망의 법칙>, <신경쇠약 직전의 여자>, <욕망의 낮과 밤>, <하이 힐>, <키카>, <비밀의 꽃>, <라이브 플래쉬>, <내 어머니의 모든 것>, <나쁜 교육>, <귀향>, <브로큰 임브레이스>, <내가 사는 피부>, <페인 앤 글로리> 총 15편. <그녀에게>는 티빙, 웨이브, U+모바일, <패러렐 마더스>는 티빙, U+모바일에서 볼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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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독자 답장왔어요📮
From.베트남 쌀국수
[RE: 눕방일기 97화][아티스트] 나도 재밌게 봤거든! 그런데 컨텐츠를 볼 때 주인공들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누군가에게는 감정이입을 하게 되잖아? 누구에게 그나마 감정이입을 했는지가 궁금해 ㅎㅎ 그리고 그나마 레카소와 닮은점이 있는 인물이라고 생각했던 등장인물이 누군지도 궁금해!!
📝레이지 카우의 답장
난 그나마 아니고 완전 신득녕 캐릭터에 감정이입 했어. 반골기질은 있는데, 잘되고 싶은 욕망도 있고, 두 마음이 섞이기도 하고. 여자, 돈 문제를 일으킬만큼 도덕성이 떨어지는 사람은 아니지만 자신이 품었던 자격지심은 오래오래 남아 (본인이 알고하는지, 모르고 하는지 헷갈리지만) 복수(?)를 하는 모습은 오싹하더라고. 내가 성공하면 저렇게 되지 않을까 싶었는데, 성공 못해서 다행인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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