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롤 켜🎅

2024. 11. 5.

캐롤 켜🎅

이름답지 않게 자진해서 8시 출근 중인 레이지 카우. 워낙 일교차가 크니 나한테 겨울은 사실상 6개월이거든? 그런데 어제부터 아침(이라 쓰고 새벽이라 읽는) 출근길 공기가 진짜 겨울이다! 싶었어. 오랜 구독자들은 귀에서 피날텐데 난 겨울 진짜 안좋아해. 그래서 싫어하는 시기엔 순간마다 좋아하는 사소한 것들을 채우려고 노력해. 지난 주 고구마를 주문했고, 어제는 겨울에만 들을 수 있는 찰리브라운 크리스마스 앨범을 시작했어. 그리고 다음 주는 눕방일기 100회야! 2주년 이벤트 한 지 얼마 되지 않아 100회 기념을 하려니, 300일 챙기고 얼마 안있다가 또 1주년 챙기는 기분이라 머쓱하네🤭 그래도 그냥 넘어갈 순 없지. 내 인생에 100이란 숫자는 많지 않았거든. 일상에 기념일을 많이 심어놓으면 재미있잖아? 다음주는 오랜만에 특집으로 찾아올거야. 기대해 줘!

#레네트와 미라벨의 네 가지 모험

왓챠, 웨이브에 에릭 로메르 감독 작품들이 대거 등록되면서 왓챠에서 11월 한 달간 챌린지를 시작했어. 참여 가능한 12편의 영화 중 <내 여자친구의 남자친구>, <레네트와 미라벨의 네 가지 모험>을 제외하고 10편이나 본 거 있지? 사실 이젠 평점을 입력한 영화의 제목마저 낯설만큼 시간이 지났지만 말이야. 덕분에 며칠 전 추억에 젖어 레카소 인스스에 올리기도 했어. 에릭 로메르에 빠져서 혼자만의 전작 보기 챌린지 중이었던 이십대 중반에 대해서 말이야.

OTT가 없던 당시에 고전영화를 보려면 서점에서 판매하는 짝퉁 DVD를 사거나, 웹하드를 뒤지거나, 한국영상자료원에 가는 방법밖에 없었어. (이렇게 말하니 너무 옛날 사람 같지만 시대는 워낙 빨리 변하니까…😅) 인터넷 사람들이 알려 준 대로 다이어리에 에릭 로메르의 대표작을 도덕 이야기 연작, 희극과 격언 연작, 사계절 이야기 연작으로 나누어 봐야할 리스트를 만들었고, 어떠한 사명감이었는지 구할 수 없는 영화는 당시 우리집에서 1시간 10분 정도 걸렸던 한국영상자료원에 찾아가 영자막으로 보기까지 했어. 이십대의 패기였을까…? 정작 삼십대가 되자 예술영화 전용관에서 연마다 에릭 로메르 특별전을 열고 있는데 이상하게 한 번도 극장을 찾은 적이 없어. 그런 기분 알아? 옛날 인생영화나 좋아했던 감독의 작품을 다시 마주하기 쭈뼛한 느낌. 나름 이런 저런 영화를 많이 보고나면 어쩐지 미셸 공드리의 <수면의 과학>을 좋아하던 어린시절의 감성을 평가절하 하거나 다시 봤을 때 옛날 만큼 좋아하지 못할까봐 멀리하는 시기를 나만 지나쳐온걸까?

에릭 로메르 필모그래피 중 가장 유명한 <녹색광선>은 제일 좋아하는 작품이라 정기적으로 챙겨보곤 해. 그러다 이번 기회에 안 본 영화를 시도해보자 싶어서 2011년 자체 챌린지 리스트에 이름도 올리지 않았던 <레네트와 미라벨의 네 가지 모험>(이하 <네 가지 모험>)을 보게 됐어. 말도 안되는 두려움 때문에 얼마나 긴 시간 에릭 로메르의 감성을 누리지 못하고 지낸걸까? 언젠가 다시 본 그 시절의 미셸 공드리는 여전히 좋았고, 에릭 로메르는 지금이 더 좋았어.

📺볼 수 있는 곳 : 왓챠, 웨이브

#<녹색광선>을 반대로 비추는 영화

보통 휴가를 떠난 주인공이 도시에서 시골로 이동하는 로메르 영화에 반해 <네 가지 모험>은 시골에서 레네트를 만난 미라벨이 함께 파리로 떠나는 구조야. 갑자기 눈물을 흘려서 상대를 당황시키거나, 틀리진 않았지만 주변에 있으면 피곤할 예민한 여자도 로메르 영화의 인장같은 캐릭터인데 <녹색광선>의 델핀느가 대표적이지. 때문에 동트기 직전에 찾아오는 1분간의 정적 ‘블루 아워’를, 만난 지 하루 된 서로 다른 타인이 공유하는 에피소드로 시작을 여는 <네 가지 모험>은 바캉스 내내 홀로 외로워하던 델핀느가 해가 질 때 바다 사이에 아주 잠깐 비치는 ‘녹색광선’을 눈물을 닦아줄 누군가와 함께 목격하며 끝나는 <녹색광선>과 거울 같은 영화야.

두 세번 정도 하늘이 맑은 여름날에만 찾아온다는 ‘블루 아워’를 시끄러운 차 소리 때문에 놓친 첫 날 밤 눈물을 터뜨리며 불특정 다수에게 분노하는 레네트는 오히려 그녀를 달래는 미라벨에게 “모두가 그렇게 얘기하죠. ‘나는 이해해’ 라고. 초록 딸기보다 잘 익은 딸기가 낫다는건 직접 먹어보기 전까지 모르는거예요.”라고 말하거든. ‘웬 피해의식? 웬 유난?’ 팔짱을 끼고 지켜보다 ‘낮의 새들이 깨어나기 전, 밤의 새들은 막 잠이 든 직후 찾아오는 고요’를 두 번째 밤에 경험하는 데에 성공한 두 사람이 푸른 어둠 속에서 포옹하는 순간 내가 초록 딸기만 맛 본 사람이었음을 깨닫기 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어. 그때만큼은 배를 와작와작 씹어먹다가 숨까지 멈추고 완벽한 고요를 나도 그들과 함께했거든. “세상에 종말이 찾아온다면 분명 그 시간대 같을 거예요.”라는 레네트의 말엔 <멜랑콜리아> 마지막 장면을 떠올렸어.

#모순 틈에서 벌어지는 기적

나머지 세 번의 모험은 파리에서 룸메이트가 된 레네트와 미라벨의 시간이야. 몇 번의 사건들을 통해 레네트는 도덕적 우월감에서 비롯된 자가당착에 빠지게 되는데, 모순된 도덕성은 감독이 주로 던지는 질문이야. 애초에 삶이란 딜레마의 연속이고 인간은 그다지 곧을 수 없다는 듯, 욕망과 이성 사이에서 갈등하는 인물은 로메르 영화에서 심심찮게 등장해왔어. 특히 도덕 이야기 연작에서는 노골적으로 이러한 주제를 다루고 있어. OTT(왓챠, 웨이브)에서 볼 수 있는 작품으로는 <수집가>, <모드 집에서의 하룻밤>, <클레르의 무릎>이 있어.

<네 번의 모험>의 레네트는 감독의 무슨 연작이라 이름 붙여진 특성들이 모두 모인 캐릭터의 종합이면서, 사랑만이 빠져있다는 점이 흥미롭더라. 그녀가 지향하는 삶의 태도, 본인이 믿는 자신과 실제의 괴리가 큰 인물이거든. 솔직히 ‘블루 아워’에 이어 마지막 모험에서 침묵의 중요성에 대해 쉴 새없이 떠드는 레네트를 지켜보는 일은 <시계태엽 오렌지> 알렉스의 루도비코 치료처럼 싫은 내 모습을 눈을 부릅뜨고 견뎌야하는 거울치료 같았어. 논리가 하나도 없는 자기중심적인 감정적 인간에, 끊임없이 자신의 감정과 생각에 대해 지나치게 설명하고, 다른 사람들을 얕잡아보며 우월감을 느끼는데다 회피성향까지 완전체가 아닐까 싶은 인물과 도대체 미라벨은 어째서 함께 살고 있는지 의아해질 무렵, 침묵의 중요성(심지어 '블루 아워'의 기적으로 묘사된)을 설파하던 영화는 오히려 침묵을 깸으로써 자가당착에 빠진 레네트를 구원하는 방식으로 감독 특유의 위트를 던져.

오랜만에 불안하고 예민했던 그 시절의 나는 어째서 에릭 로메르를 탐미했는가 떠올랐어. 어떤 식으로든 입바른 교훈을 남기지 않아서, 인간의 모순을 다루는 다정하고 유머러스한 태도에 반했기 때문이야. 가볍지만 천박하지 않고, 재치있지만 통찰력 있는 대화가 푸른 자연과 붉은 옷을 입은 여자들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에릭 로메르의 영화들. ‘녹색광선’과 ‘블루아워’처럼 자연에서 비롯된 아주 짧은 기적의 순간들이 꼭 나타나곤 해. 그 순간만큼은 기적을 경험하는 인간들조차 자연의 일부야. 몇 초만에 사라져버리는 고요의 순간이 나에게도 찾아올 것만 같아서. 기적을 믿는 사람이 잠시 되어보는거야.

#관람포인트01

서문에 언급했던 에릭 로메르의 세 가지 연작 주제를 알려줄게. 기왕 보는거 주제에 맞게 도장깨기 하면 뿌듯하잖아? 밑줄 친 영화들은 왓챠, 웨이브에서 볼 수 있어. 참고로 내 왓챠피디아 별점에 따르면(오래 전 기준이지만) <녹색광선>, <여름 이야기>, <가을 이야기>, <모드의 집에서 하룻밤>에 별 5개를 줬어. <가을 이야기>는 유달리 좋았던 기억이 있어서 재관람을 한다면 이 영화를 제일 먼저 볼거야.

‘도덕 이야기’ 연작 : <사자좌>(1959), <몽소빵집의 소녀>(1963), <수잔느의 경력>(1963), <수집가>(1968), <모드의 집에서 하룻밤>(1969), <클레르의 무릎>(1970)
‘희극과 격언’ 연작 : <비행사의 아내>(1980), <아름다운 결혼>(1982), <해변의 폴린>(1983), <보름달이 뜨는 밤>(1984), <녹색광선>(1986), <내 여자친구의 남자친구>(1987)
‘사계절 이야기’ 연작 : <봄 이야기>(1990), <겨울 이야기>(1992), <여름 이야기>(1996), <가을 이야기>(1998)

#관람포인트02

영화도 영화지만 패션도 너무 인상적이야. 인스타그램에서 에릭 로메르 영화에서 패션만 모은 계정도 있어. 이런게 프렌치 시크..? 난 아직도 에릭 로메르 영화 여배우 스타일의 옷을 찾아볼 때도 있어. 무심하게 걸치는 블레이저나 니트, 슬랙스가 시그니처인데, 무엇보다 일단 빨간 포인트가 있어야해. 마침 29CM에서 이굿위크 중이길래 나름 에릭 로메르 스타일(?)의 빨간 니트를 몇 개 골라와봤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