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이지 콘텐츠의 홍수 속에서 살고 있는 것 같지 않아? 매주 봐야할 것들이 쏟아져서 리스트는 점점 길어지는데 물리적인 시간은 한정되어있으니 마음의 짐만 늘어나고 있어. 최근 안식월을 쓰고 밀린 영화를 보고 싶다고 했더니 공유받은 영상이 있어. 보면서 남일 같지가 않아 눈물나게 웃었는데 이게 웃겨서 우는건지 슬퍼서 우는건지..^^ 그러다 새삼 매주 뉴스레터를 읽어주는 구독자들에게도 너무 고마웠어! 영상 뿐 아니라 볼 게 넘쳐나는 와중에 시간을 레카소 뉴스레터에 내어준 거니까 말이야. 앞으로도 열심히 보고 추천해볼게. 누군가에게 소소한 가이드가 될 수 있다면 무척 기쁠거야.
최근 유머와 다정함을 가장 큰 미덕으로 꼽고 있는데, 이 모두를 가지고 있는 시트콤을 추천해줄게. 애플tv의 [맵다 매워! 지미의 상담소]야. 제목만 보고는 나도 안봤을 것 같아. 원제는 [Shrinking]이야. 정신과 의사나 심리학자를 뜻하는 단어야.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이 드라마의 주인공인 지미는 심리 상담사이고, 지미의 상담소 동료와 환자들, 딸과 주변 이웃과의 관계로부터 이야기가 진행돼.
1년 전 갑작스런 사고로 아내를 잃고 방황중인 지미는 술과 약, 여자에 빠져 살다가 정신을 차리고 일상을 되찾기 위해 노력해. 그 시작은 자신의 슬픔에 빠져 미쳐 돌보지 못했던 고등학생 딸과의 관계 회복이야. 이미 옆집 이웃인 리즈가 부모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는걸 뒤늦게 깨달은거야. 그리고 매번 같은 주제로 찾아오는 환자들과의 상담에도 환멸을 느끼고 있는 상태야. 그래서 결국 상담사로서의 선을 넘고 인간적으로 솔직하게 접근하기로 마음을 먹어. 매번 남편에게 가스라이팅 당하는 환자에게는 집을 나가고 남편을 떠나라고 직언을 한다든지, 분노조절장애로 폭력 전과가 있는 숀에게는 복싱을 추천한다든지, 상담사의 직업윤리를 어기는 과감한 행동들을 하기 시작해.
재미있는 점은 누구보다 상담이 필요한 사람은 지미라는 점이야. 이 드라마의 묘미는 상담사와 환자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순간들인데, 특히 지미의 멘토인 폴, 동료 개비가 서로의 상담사가 되어주는 장면들이 인상적이야. 이 드라마의 대부분의 갈등은 관계에서 비롯되거든. 그건 상담사로서 권위적인 위치에 있는 폴조차 마찬가지야. 나이와 경험이 많은것과 별개로 관계 앞에서 모두가 평등해져. 누군가의 인생에 대해 카운슬링하는 역할을 한다고 자신의 삶까지 혼자서 완벽하게 이끌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니야. 그래서 그들은 기꺼이 서로에게 기대고 그로 인해 갈등이 생기기도 하지만 이내 또 누군가의 조언에 기대어 여러 관계를 점차 회복시켜나가. 심지어 환자인 숀과 상담사인 지미의 관계도 어느순간 누가 누구를 위해 존재한다기보다 동등하게 서로의 문제를 보듬어주는 관계로 발전해가. 그래서 이 드라마의 캐릭터들은 모두 약간의 인간적인 흠이 있는 연약한 사람들이지만 하나같이 사랑스러워. 왜냐하면 자신의 연약함을 숨기지 않거든.
보면 볼수록 나는 주인공인 지미보다 오히려 해리슨 포드가 연기한 폴 역할에 마음이 많이 가더라고. 오랜 동료들에게 가족을 한번도 소개하지 않는다거나 집에 초대하지 않는 등 굉장히 사적인 영역에서 선을 긋는 스타일인데 지미의 딸 앨리스를 몰래 상담해주고 있거나 불평하면서도 언제나 지미의 고민을 들어주는 따뜻한 면모가 동시에 보여져. 사실 폴은 불치병 초기단계야. 나이도 꽤 많지. 그런 상태에서 말미에 연애를 시작하게 되는데, 나는 그 장면에서 의외로 내 편견을 바라보게 되었어. 나이들고 몸이 아픈 사람에게는 사랑의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했던 모양이야. 물론 이 역시 판타지의 세계라 할 수 있지만 나는 이런 식으로라도 다양한 삶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이야기가 좋았어.
그리고 폴을 포함해서 모든 인물들은 크고 작은 불행을 견디며 살고 있는데, 이 드라마는 그 불행들을 대단히 과시하거나 진열하지 않고 유머러스하게 그 순간들을 이겨내는 방법을 택했어. [맵다 매워! 지미의 상담소]는 근래 내가 본 콘텐츠들 중에 가장 많이 웃은 드라마인데, 그렇다고 이야기마저 가벼운 것은 아니야. 삶은 기쁨과 슬픔, 행복과 불행, 이렇게 단면으로 나뉘지만은 않고 그 모든 것이 섞여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유머를 택했다고 봐. 그래서 보고나면 외로움이 조금은 걷어지는 기분이야. 독립적일 수는 있지만 인생의 모든 문제를 혼자 해결할 수는 없으니, 힘들면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또 힘든 친구가 손을 내밀면 그 손을 잡아주며 살고 싶어져. 결국 삶은 관계의 연속이다 싶거든. 위로받고 싶은데 우울해지고 싶진 않을 때 사려깊고 따뜻하지만 유쾌한 친구가 필요할 때 이 드라마를 보면 좋겠어. 영화 <50/50>의 세스 로건 같은 친구랄까. 실컷 웃고 나면 기분이 좋아질거야.
소소한 관람포인트1. 제작진
몇 주전 소개했던 [테드 래소]에서 로이 켄트를 연기하고 제작에 참여했던 브렛 골드스타인과 [테드 래소] 제작자 빌 로렌스, [맵다 매워! 지미의 상담소]에서 지미를 연기한 제이슨 세걸이 제작했어. 그래서인지 [테드 래소]의 장점인 따뜻함과 유머가 그대로 녹아있는 듯 해. 다른 점을 찾자면 [테드 래소]보다 19금 유머가 더 많은 편이야.
소소한 관람포인트2. 시즌2
최근 시즌2 제작이 확정되었다고 발표되었어. 아직 구체적인 내용이나 촬영, 릴리즈 시기는 미정인 것 같아. 하지만 제작진들이 인터뷰에서 3개 시즌을 생각하고 있다 하니 아직 남은 이야기가 꽤 있는 모양이야.
소소한 관람포인트3. 해리슨 포드
제작자 빌 로렌스는 처음부터 폴 역할로 ‘해리슨 포드 타입’을 생각했다고 해. 하지만 진짜 스타 배우인 해리슨 포드를 섭외할 줄은 몰랐던 거지. 그런데 나중에 대본을 읽고 해리슨 포드가 “내가 읽었던 대본들 중 최고”라고 극찬했다고 하니 얼마나 행복했을까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