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난 멈추지 않는 비에 눅눅해진 레이지 카우. 대한민국도 이제 우기가 존재한다는 걸 받아들이기 어려운 와중 몸과 마음을 뽀송하게 유지하기란 더욱 쉽지 않지만 잠깐이라도 틈을 내주면 잠식당하고 말테니 최선을 다해 방어하고 있어. 나는 주로 자극을 통해 활기를 얻는 편이라 새로운 취미를 상상하는게 취미랄까? 머리속에서 이미 실행이 완료된 다음 귀찮아져서 포기하는 편이야. 그런데 누워서 할 수 있는 심리테스트에는 환장하지. 최근엔 자꾸 인스타그램 광고에 떠서 정신건강 전문가가 만들었다는 커리어 진단을 해봤어. 37,000원이라 술 한 잔 안먹는 셈 치고 해봤는데 꽤 흥미로웠어. 왜냐면 내 BEST 직무로 연구/개발이 나왔거든. 평생 콘텐츠 마케팅만 하고 살아왔는데 당황스럽더라. 참고로 마케팅은 4위로 나왔어. 누워서 나에 대해 탐구하는 취미가 있는데 마침 직무도 고민인 사람들이 있으면 한번 해봐! 

간만에 이야기보다 이미지로 기억되는 아름다운 영화를 봤어. 작년 말 개봉했던 영화 <가가린>이야. 왓챠에서 볼 수 있어. 제목은 1961년 세계 최초로 우주비행에 성공했던 러시아 우주비행사 ‘유리 가가린’의 이름이자, 이 이름을 따서 만들어진 파리 교외의 공공주택 ‘가가린’을 의미해. 사회주의자들의 일종의 거주 실험이었던 ‘가가린’은 1963년 ‘유리 가가린’의 축하 속에 화려한 시작을 알렸지만, 이념과 건물이 낡아가기 충분한 시간이 흘러 어느 자부심도 남지 않았을 2019년 노후화로 철거됐어. <가가린>은 바로 그 시점, 평생을 ‘가가린’에서 살아왔던 한 소년 ‘유리’(알세니 바텔리)가 자신의 유일한 세상을 지키는 방법을 우주를 유영하듯 우아하고 유려하게 그린 작품이야. 

#사라진 공동체

‘가가린’에 사는 ‘유리’는 ‘유리 가가린’처럼 우주를 항해하는 꿈을 꾸는 소년이야. 하지만 현실의 유리는 하늘을 종종 올려다보는 것 외엔 꿈을 소리내어 말하는 것조차 사치처럼 느껴지는 일상을 살고 있어. 부모의 돌봄으로부터 멀어진지 오래라 가족의 기억이 남아있는 가가린을 유리는 놓을 수 없는 듯 해. 현재 가족의 자리를 대신하는 것도 가가린의 이웃과 친구들이고 말이야. 유리는 가가린의 철거 판정을 막기 위해 건물 곳곳을 친구들과 조금씩 수리해가는데 열중해. 소년이 지키고자 했던 건 집이라는 물리적인 보호막 외에도 자신을 혼자 두지 않을 사람들과의 유대, 정신적 지지였을거야. 350세대가 살아가는 대규모 아파트이지만 모든 사람들이 유리의 고군분투를 의미있다 생각하진 않아. 더이상 서로가 연결되지 않은 무효화된 공동체는 유리가 느끼고 있었을 외로움에 관심이 없었을 테니까.

#가가린의 유토피아

영화 초반 유리는 가가린의 철거를 막는다는 일념으로 하늘 너머에 가있는 마음과 별개로 두 발을 땅에 딛고 살아가고 있었어. 그 목표가 사라지자 유리는 이윽고 중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우주인이 되어 거대한 아파트 단지를 자신만의 유토피아로 바꾸기로 결심해. 철거가 결정된 후 쓸모를 잃은 건물의 고철과 부품들로 핸드메이드 우주와 우주선을 만들기 시작하지. 전기와 수도, 가스 등 생존에 필요한 모든 것이 끊겨 생명이라곤 유리밖에 남지 않은 가가린은 한 소년의 집착적인 희망 덕에 마치 살아있는 유기적 생물체가 되어 잠시나마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여들 수 있는 도피처로서 기능해. 유리가 땅보다 하늘을 더 자주 바라보는 건 이때부터였어. 하지만 우주의 본성은 외로움이라서 완벽한 단절, 완벽한 고독으로부터 유리는 자유로울 수 없어.

#마술적 사실주의

아름다운 초현실적 판타지를 걷어낸 유리의 현실은 참혹해. 하지만 감독은 죽음을 기다리는 가가린과 유리의 마지막 구조신호를 현실만큼이나 비참하게 묘사할 생각이 없어. 오히려 괴리를 극도로 벌려 유리로 대표되는 보호받지 못한 사람들의 삶을 ‘마술적 사실주의’로 묘사하지. 영화가 던지는 메세지는 미래지향적인 연출과 반대로 마치 가가린이 처음 세워지던 60년대의 사회주의로 역행하는 것처럼 느껴져 의아하기도 한데, 핵심은 ‘공동체’가 아니었을까 해. 한 시대를 상징하던 건물의 철거는 건물 하나가 아니라 실재했던 수많은 삶과 관계의 소멸일 수 있음을, 그래서 유리의 세계는 한순간에 모두 사라졌다는 사실을 다큐멘터리적으로 접근해서 판타지로 구현한 영화가 <가가린>이라 할 수 있어. 극장에서 못 본게 정말 아쉬울만큼 영상미가 뛰어나. 마치 설치미술의 입체적 체험에 참여한 기분이 들 때가 있어. 규모는 작지만 오히려 3D 아이맥스에 최적화된 영화 같았어. 스크린으로 볼 수는 없지만 집에서라도 유리의 작은 우주를 만나보길 바라. 

#관람포인트

가가린이 떠오르는 우리나라 공동주택이 있어. 예술의 전당을 설계한 故김석철 건축가의 대구 ‘한양가든테라스’라는 곳인데, 1983년 입주를 시작한지 41년 만에 철거에 들어갔어. 단 19세대에 불과한 이 공간은 자연과 사람의 어울림을 중점에 두어 마당이 있는 도시 속 아파트로 지어졌어. EBS 다큐프라임에서 방영한 ‘도시예찬 2부 안녕, 가든테라스’에 이 건물에 대한 철학과 사람들의 삶이 잘 담겨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