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오랜 고민 끝에 뉴스레터를 이제 그만두겠다고 결심한 날, 갑자기 특정 시간대에 구독자 수가 오르는거야. 그래서 찾아보니 어느 사랑하는 구독자님께서 커뮤니티에 뉴스레터 추천글을 쓰면서 눕방일기 언급을 했더라고! 그 글을 보고 침대에 웅크리고 있다가 벌떡 일어났어. 관심을 먹고 사는 마케터라 이런 리액션은 하나하나 너무 소중하고 감사해. 글 지워질까봐 캡쳐했고 지칠때마다 종종 꺼내볼게..사랑해액!!😭 인간은 역시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는 걸까? 누군지 알 수 없는 한 사람의 글 하나가 늪에 빠진 레이지 카우를 구했다고 하면 오버이려나? 난 그렇게 느끼거든. 얼마 전 만난 친구가 “넌 성찰을 자주하는 것에 비해 고치려는 노력은 안하는 편”이라는 한줄평을 남겼는데 지금도 성찰하고 있는 걸 보니 이정도면 병인 것 같아😂 여튼 매주 꼬박꼬박 눕방일기를 열어보는 모두에게 새삼 고마워!(연말이라 감성이 폭발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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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희에게
문득 구독자들은 뭘 좋아할지 궁금해서 지난 주 인스타그램 스토리로 ‘겨울, 연말에 떠오르는 나만의 콘텐츠’를 추천받았는데 다른 사람들의 취향을 구경하는 게 너무 재미있더라고! 그래서 이번 주는 내가 역으로 추천받은 작품을 감상한 후기를 준비했어. 바로 임대형 감독의 <윤희에게>야. 벌써 개봉한지 4년이나 되었지만 한국독립영화를 즐겨보는 편은 아니라 명성은 익히 들었는데도 어쩐지 손이 가지 않았거든. 이번 기회에 드디어 보고나니 왜 이 영화를 안봤다고 했을 때 본 사람들이 안쓰러운 눈으로 쳐다봤는지 알 것 같아. <윤희에게>는 사랑과 가장 거리가 먼 이름 같은 엄마의 첫사랑에 대한 이야기야. 대학진학을 앞둔 딸 새봄(김소혜)이 엄마 윤희(김희애)에게 도착한 낯선 편지를 훔쳐 보는데 지금의 엄마에게는 도저히 느껴지지 않는 애틋함을 엿보곤 엄마와 아빠는 왜 이혼했을까, 엄마는 아빠를 만나기 전 누구를 만났을까, 엄마가 좋아한 사람은 누구였을까, 윤희가 현실을 위해 지워버린 감정의 기억을 파고들며 엄마의 속내를 알고 싶어해. 발신인인 쥰(나카무라 유코)이 편지를 보내온 곳은 홋카이도의 오타루. 새봄의 제안으로 겨울의 오타루에 여행을 온 윤희는 오랜시간 묻어둔 쥰에 대해, 자신의 감정에 대해 마주하는 시간을 갖게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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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의 성소수자
윤희에게.
잘 지내니? 오랫동안 이렇게 묻고 싶었어.
너는 나를 잊었을 수도 있겠지.
벌써 20년이 지났으니까.
갑자기 너에게 소식을 전하고 싶었나봐.
살다보면 그럴 때가 있지 않니?
뭐든 더이상 참을 수 없어질 때가.
쥰이 윤희에게 쓴 편지 도입부야. 마지막 두 구절이 마음에 유달리 남았어. 제 41회 청룡영화상에서 감독상, 각본상을 수상할 당시 임대형 감독은 수상소감으로 “<윤희에게>는 퀴어영화”라고 정확하게 명명했어. 최근 LGBT 장르는 별도 영화제가 생길만큼 다양해졌지만 부모 세대의 성소수자에 대한 영화는 거의 없지 않았을까? 사실 LGBT까지 갈 필요 없이 사랑이라는 소재 안에서 중년은 꽤 소외되어왔다고 생각해. 그런 점에서 이 구절은 윤희와 쥰의 삶을 압축하고 있어. 자신을 부정당한 채 살아왔던 한 세월이 굵직하게 흐르고 난 뒤, 지금까지 참아왔던 모든 것이 견딜 수 없어서 아주 작은 자극에도 폭발해버리고야 마는 순간이 찾아왔을거야. 누구라도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인 경험이기도 한데, 꽉 찬 감정이 넘쳐 흘러버리는 찰나를 포착한 문구처럼 보였어. 서로의 첫사랑이었던 학창시절 윤희와 준의 만남은 지나가는 풋사랑이라고 하기엔 정체성을 규정하는 중요한 사건이었을 것이고, 그래서 이별 뒤 두 사람 모두 평생 이방인처럼 살아왔겠지. 본인도 외롭지만 옆의 사람도 외롭게 만드는 사람이 바로 지금의 윤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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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의 오타루
영화는 오랜 시간 떨어져있던 두 사람의 재회보다는 오히려 공백의 시간을 표현하는 데에 집중하고, 쥰이 윤희에게 “겨울엔 눈과 달 밤 고요 뿐”인 “이곳은 너와도 잘 어울리는 곳”이라고 말하는 오타루는 그 시간을 메우는 중요한 축이야. 나에게 겨울하면 떠오르는 이상적 풍경은 (가본 적은 없지만)홋카이도 오타루야. 영화 <러브레터>와 드라마 [퍼스트 러브 하츠코이]의 도시이기도 해. 눈이 허리까지 쌓여있는 온통 하얀 세상은 분명 엄청나게 추울텐데도 눈의 폭신한 인상 때문인지 포근해 보여. 게다가 폭설이 지닌 고립감과 비현실성은 그곳에서의 사랑이 다른 사랑과 분리되는 고유의 성질인 것처럼 만들어. <윤희에게>가 윤희와 쥰이 20년 만에 마주하는 공간을 오타루로 정한 것도 이러한 착시와 무관하지 않을거라고 생각해. 대부분 하얗고 가끔 사람이 드문 서 있는 풍경은 윤희와 쥰의 시간과도 비슷하단 생각이 들었어. 그럼 윤희와 쥰의 공백 위에 드문 서 있었던 사람들은 누구였을까. 그들은 어떤 사람이 옆에 있길 허락했을까. 윤희 옆엔 새봄이, 쥰 옆엔 고모 마사코가 있어. 모녀관계로 대표되는 그들이 서로에 대해 알고 있지만 숨긴 것들,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몰랐던 것들을 조금씩 꺼내놓는 과정과 윤희와 쥰의 거리가 좁혀지는 과정이 겹쳐질 때 사람을 나아가게 만드는 힘이란 저런 순간이지 않을까 싶어서 울컥했어. 감독은 인과관계는 존재하나 논리적이진 않은 개별의 사건이 하나로 연결되는 감정의 통로를 알고 있는걸까? 영화의 모든 과정이 인간의 근원적 고독을 정확히 인지하고 데워주는 난로 같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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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네 꿈을 꿔
<윤희에게>에서 여러 인연은 교차하고 좌절되고 좌절될 위기에서 새로운 형태로 변형되어 결국 사랑은 멈춘 적이 없어. 그럼 쥰과 다시 마주하게 된 윤희의 삶은 해피엔딩일까? 그들의 사랑에 대해서 오히려 과묵하길 선택한 이 영화는 최소한의 단어와 행동으로 다음을 기약해. 한 시점이 인생의 전체를 결정짓지 않는다는 듯, 그러나 간혹 벌어지는 기적의 순간은 귀하다는 걸 알고 있다는 듯 말이야. 내 속의 시끄러운 모든 감정을 다 삼켜버릴 것 같은 겨울의 오타루에서 돌아온 윤희가 쥰에게 쓴 편지의 추신에서 울지 않을 도리가 없었어. 종종 꿈에서 그리운 사람이 나오면 상대도 꿈에서 나를 만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부칠 수 없는 편지를 써본 사람이라면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답장을 기다리는 간절함을 알거야. 때로 그 한통의 편지 때문에 한 시절에서 멈추기도 하니까. 무엇을 기다리든 더이상 참을 수 없어진 사람이라면 내 울음소리마저 묻힐 것 같은 고요한 겨울의 영화 <윤희에게>를 보면 좋겠어. 도 혹시 어느 시간에 멈춰있다면 윤희처럼 다음으로 넘어갈 수 있는 용기가 생기길 바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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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람포인트01
영화에서 쥰의 고모 마사코가 운영하는 카페는 벌써 팬들의 성지가 된 모양이야. ‘카페 쵸비차(Cafe chobicha)’인데 팬케이크 맛집인가봐. 오타루역에서 도보10분 거리래. 올 겨울 여행을 준비하고 있다면 꼭 들러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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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람포인트02
편지를 매개로 한 영화이니만큼 <윤희에게>를 활자로 소장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각본집과 메이킹북을 주목해줘. 각본집에는 무삭제 시나리오와 쥰을 연기한 배우 나카무라 유코와의 서면 인터뷰가, 메이킹북에는 미공개 스틸, 스토리보드, 영화 제작 노트가 담겨있다고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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