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비발디 여름(feat.찐 광기)’라는 제목의 쇼츠를 홀린듯 눌러 봤어. 베르사유 궁전 왕립 오페라 오케스트라 지휘자이자 바이올리니스트인 스테판 플레브니악의 테크니컬하고 격정적인 연주에 그 시절 헤비메탈이라는 댓글을 보고 한참 웃었어. 난 실제 사계 중에서도, 비발디 사계 중에서도 여름을 좋아해. 여름의 생명력을 떠올리며 오랜만에 잊고있던 비발디의 CD의 먼지를 털고 틀어보았어. 마침 여름을 주제로 인스타그램에 뉴스레터 번외편도 썼어. 이탈리아의 여름이 떠오르는 루카 구아다니노와 파올로 소렌티노 감독에 관한 글이야. 번외편을 정기적으로 써보려 하는데 현생에 치여 쉽지 않네👀 그래도 잊을만 할 때 찾아올테니 레카소의 인스타그램에도 관심 부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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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 아 유
사실 이번 주는 책 소개할 차례인데 펑크가 났어 미안..😭 지난 두 달 동안 읽은 책들이 마땅치 않아서 지난 주말 새 책을 가열차게 읽어보려 했는데 다 읽지 못했거든. 고민하던 중에 친구가 63빌딩 아쿠아리움이 이달을 마지막으로 운영 종료된다는 소식을 듣고 <후 아 유> 봐야겠다고 하더라고. 그거 알아? 나는 자칭 <후 아 유> 재개봉추진위원회야. 예술영화관 극장팀에서 일할 때 팀장님과 동료들에게 과장하면 1일 1재개봉 제안을 했었는데 나만의 짝사랑으로 끝났어. 프리랜서 시절엔 개봉 20주년에 맞춰 재개봉을 해보자고 어설픈 기획안으로 제작사에 메일을 보내기도 했지.. 진심 느껴지지? 수 년 전 오보이매거진에서 100회를 맞아 인생영화 10편을 100명에게 묻는 특집이 있었어. 그때 어렵다는 인생영화 리스트를 만들어봤거든. 인생영화의 기준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만도 한참 말할 수 있겠지만 일단 그때도 지금도 <후 아 유>는 고민 없이 넣을거야. 당시 소개글을 뒤져서 그대로 옮겨볼게. ‘다시보면 비정규직에 열정페이까지 구시대적 문화가 가득하지만, 그럼에도 시티팝을 듣는 기분으로 그 시대가 물씬 그리워지는 감성이 있다. 조승우의 그 유명한 기타 라이브 장면을 위해서 다시 보기도 한다. <후 아 유> 재개봉추진위원회 함께 하실 파티원 찾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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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의 Cyber Lover
상대를 만나지 않은 채 대화만으로 사랑에 빠질 수 있을까? 수 많은 러브 게임 예능의 유구한 역사가 풀리지 않는 이 궁금증을 실험해왔어. 메타버스와 롯데월드타워 이전의 시대, 이제 막 사이버 공간 속 가상의 자아가 생겨나고 63빌딩이 국내 가장 높은 빌딩이라는 기록을 마지막으로 가지고 있었던 2002년, <후 아 유>는 63빌딩 30층의 게임 기획자 형태(조승우)와 지하 1층의 수족관 다이버 인주(이나영)가 현실과 가상현실을 오가는 동안 사랑의 조건에 대한 근원적 질문을 던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야. 지금식으로 말하면 스타트업 대표인 형태는 2년 동안 준비하던 채팅 사이트 ‘후아유’의 정식 오픈을 앞두고 돈줄과 월급은 막히고, 팀장은 떠나버린 최악의 상황이야. 그러던 중 베타서비스에 신랄한 후기를 남긴 닉네임 ‘별이’의 당돌함에 호기심을 느껴 프로필을 뒤져보는데 같은 빌딩에서 일하는 인주라는 사실을 알게 된거지. 인터뷰를 가장한 형태와 인주의 첫 만남은 그렇게 시작됐어. 인주와 ‘별이’, 형태와 ‘멜로’의 관계성은 나아가 각각 인주와 형태, 별이와 멜로 사이의 간극만큼이나 묘해. 동일인물임에도 익명성 뒤에 숨은 이들은 현실과는 다른 자아로 서로에게 존재해. 인주가 형태가 아닌 멜로에게만 자신의 속마음을 드러내며 애틋한 감정을 느끼는 일도 이상하지 않아. 형태가 인주에게 멜로 뒤의 자신을 드러내지 못하는 이유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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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 뒤의 청춘
종종 오래 알던 사이에도 잘 꺼내지 않던 속마음을 처음 만난 사람에게 문득 하게 될 때가 있어. 어떤 거리감은 오히려 관계의 거리를 좁혀주고 또 어떤 익명성은 가장 진실한 태도로 서로를 마주보게 해. <후 아 유>는 익명에 숨고 싶던 그 시절 청년의 초상이야. 당시는 IMF를 지나 곳곳에서 “부자되세요”라는 덕담을 나누면서도 신용불량자 역시 급증하던 모순의 시기였어. 밀레니얼 이후 새로운 세상이 열린 듯 디지털 시대로 급변하던 2002년의 들뜬 허황은 안정과는 확실히 다른 방향의 것이었어. 와중에 꿈과 연애와 생계라는 청년의 전부인 단어들이 온통 흔들리던 인물들은 ‘후 아 유’라고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에 대답하기를 유보하거나 대답할 수 없어서 대신 각자의 방식으로 ‘티티카카’ 호수를 찾고자 게임 ‘후아유’에 모여든 사람들이야. 현실 세계의 문제를 지운 이 곳엔 불필요한 자존심을 걷어낸 진짜 내가 있어. 현실에서 불가능한 일들도 가능하지. 하지만 별이와 멜로가 가까워질 수록 인주와 형태가 느끼는 혼란은 ‘내가 안다고 믿는 저 사람을 정말로 알고 있을까’에 대한 의심에 기인해. 나는 반대로 인주에게 자신의 정체를 밝히기로 결심한 형태가 “진짜 내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라고 말할 때 정말 형태가 멜로보다 진짜일까 궁금했거든. <인셉션>에서도 행복할 수 있다면 꿈에서 깨어날 필요가 없다고 여기는 편이었지만 영화는 익명을 벗고 현실 세계에서 마주하는 두 사람을 통해 분명한 메세지를 주고 있어. 우리도 진짜같은 가짜를 사랑할 때가 더 많을지도 몰라. 말로는 진짜를 찾으면서도 정작 마주하면 예상보다 흠이 많아서 가짜일거라고 암시하거나 외면하기도 할거야. 스스로에게 그런 프레임을 씌우기도 하면서. 결국 별이와 멜로가 인주와 형태로 만날 수 있었던 건 불완전함까지 나와 너라고, 제대로 ‘후 아 유’에 답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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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티팝과 레트로 퓨처리즘
22년이 지난 이 영화를 다시 보면 앞선 소개글처럼 구시대적 감수성에 흠칫 놀랄 거야. 그럼에도 <후 아 유> 이름만 들어도 심장이 뛰는 나는 문득 궁금해졌어. 사람들은 왜 자신 이전 시대의 문화에 열광할까. 시티팝은 심지어 일본의 장르잖아. 경험하지 않은 시대에 대한 노스탤지어는 집안에서 관망하는 연애예능처럼 현실의 고통은 지우고 간접 경험의 만족만 얻을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감정같아. <후 아 유>를 좋아하는 마음도 연장선에 있다고 봐. 영화 속 현실은 사실 지독한데 대책없는 Cyber Lover(발음 조심)의 낭만을 더 지독하게 보여주잖아. 형태 회사의 월급이 밀린 직원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인주가 수영 선수를 그만둔 순간의 절망은 어땠을까, 번번이 연애에 실패하는 친구들의 마음은? 문제가 깊어지기 전에 델리스파이스, 언니네 이발관, 롤러코스터, 크라잉 넛, 레이지본 등 당대 최고 인디밴드들의 음악이 그들의 빈 서사를 대신해. 바다 대신 수족관에 사는 대형 돌고래가 안타깝지만 아쿠아리움이 사라지는 건 아쉽고, 운영이 종료된 이후의 물고기들은 어디로 갈지 걱정이지만 아쿠아리움이 담긴 추억의 영화를 보며 순간의 아름다움을 취하는 것은 노스탤지어라는 이름의 회피 같기도 해. 이런 이질적인 감정으로 <후 아 유>를 좋아하는 마음이 마치 각각 형태와 멜로처럼 느껴져. 재밌는 점은 Y2K 감성을 추억하게 되는 <후 아 유>가 당시로선 미래적인 영화였다는 사실. 최근 트렌드는 레트로에서 레트로 퓨쳐리즘으로 한발 나아간듯 한데, 아날로그를 소환하는 방법 중 CD, 카세트테이프, 폴더폰 등의 기계를 활용하는 비중이 큰 영향도 있으리라고 봐. <후 아 유>는 그런 점에서 레트로 퓨쳐리즘의 예언과도 같은 영화야. 2000년대 초반 감성이 완벽하게 고증된 작품이라 취향만 맞는다면 사랑에 빠지지 않을 도리가 없을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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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람포인트01
(영상 4분 50초부터)조승우가 ‘윤종신의 환생’, ‘긱스의 짝사랑’, ‘나미의 유혹하지 말아요’를 메들리로 부르는 장면이 때마침 틀었던 TV에서 나오지 않았다면 내 인생은 어떻게 되었을까? 싶을 정도야. 이제 난 <후 아 유>를 알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걸. <후 아 유>보다 훌륭한 영화는 많겠지만 <후 아 유>의 이 장면보다 매력적인 장면은 드물거야. 이후 영화 끝까지 본 다음 아마도 비디오를 빌려 전체를 보게 됐고, 조승우를 사랑하게 됐어.(고1때부터 함께하는 인형 이름도 승우야.tmi) “만나자. 진짜 내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라는 대사는 거의 <중경삼림> 양조위의 “캘리포니아는 어때요?”만큼이나 심쿵했던 대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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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람포인트02
앞서 말한대로 당대 최고 인디밴드들의 노래가 멈추지 않고 흘러나와. 음악을 듣자마자 2000년 초반으로 돌아간 기분이 들어. 특히 마지막 장면에서 나오는 ‘챠우챠우’는 완벽하지. 델리스파이스 원곡이 아닌 점이 아쉬워. 이전에도 잠깐 언급했지만 델리스파이스는 1020을 통틀어 제일 좋아한 뮤지션이었거든. 사운드트랙을 모아둔 플레이리스트를 가져왔어. 완전 잊고 있었는데 'Blue In Green의 같이 갈까나'는 대학때 기타 3개월 연습하던 시절 열심히 쳐봤던 곡이라 너무 반가웠어. 참고로 최호 감독은 이후 조승우와 <고고70>에서 다시 만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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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람포인트03
영화 속 게임 ‘후아유’는 실제 ‘후아유닷넷’이라는 이름으로 서비스 되었다고 해. 하지만 큰 반향을 끌지 못하고 사라진 모양. 다들 당시 어떤 채팅 게임을 했어? 난 소프트맥스의 4LEAF라는 게임을 좋아했어. ‘주사위의 잔영’으로 유명한데 채팅도 가능했거든. 보통은 학교 친구들이랑 모이곤 했는데 어느 날 (닉네임도 아직 생각나) ‘세피아’라는 사람이랑 대화를 하게 된거야. 캐릭터가 남자라 남자겠거니 생각한 그 사람은 항상 같은 제목의 방을 만들어서 매일 나는 세피아가 접속했는지 검색하고 주기적으로 들어갔던 기억이 나. 중딩의 레이지 카우는 말만 걸어줘도 설렜나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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